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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정 (3,7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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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꿈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는 ‘제 방’이라고 하면 열 가지가 넘는 수많은 풍경이 떠오르던 아이였습니다. 기억이 제대로 나지도 않는 아주 먼 옛날부터, 저는 집안 사정상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이사를 반복하느라, 제가 머물고 몸을 누이며 잠들었던 방에 대한 기억 또한, 참으로 많고 다채로운 풍경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지하와 아파트를 오가면서 높낮이의 차이를 두었던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밀집된 대도시, 비교적 한적한 지방, 매캐한 연기가 피어나던 공장 근처, 비료 냄새를 풍기던 밭 근처, 겨울철 바람이 춥게 드나들고, 여름에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아 땀을 흘리던 기억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손에 꼽을 수 있을 수준의 이사 기억을 가지는 것에 비하면, 제 기억은 그야말로 천변만화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점차 마음으로 갈망하게 되었던 것은, 함부로 옮겨 다니지 않는 저만의 ‘공간’의 중요성이었습니다. 집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제 방이 있다가도 생기고, 다시 없어지고, 생겼다가도 또 거실에서 자게 되는 등의 경험을 하느라, 저는 항상 마음이 편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항상 데리고 다니시던 부모님을 제외하면, 제게는 언제까지나 제 옆에 있어줄 것이란 확신이 드는 사물이나 생물의 존재가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나 이사가 용이할 수 있게, 가진 물건을 최소화해 언제라도 간단히 버리고 떠날 수 있게끔 초탈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어른들한테는 어린애가 답지 않게 욕심도 참 없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장소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생활의 반복에서, 저는 언젠가 제 소유의 집을 얻게 된다면 어디로도 떠나거나 옮겨가지 않을 저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꿈을 남몰래 꾸곤 했습니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인생의 와중에도, 그 꿈만이 저를 기대게 해준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것입니다.
누나는 참 로봇 같아! 복사하기
“누나는 참 로봇 같아!” 어린 시절, 분 단위까지 일거수일투족을 짜놓은 저의 계획표를 보고 남동생이 감탄하던 말입니다. 자기는 당장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도 괴로운데, 누나는 여름방학 생활계획표보다 훨씬 촘촘한 계획을 세워두고 어떻게 하나하나 다 실천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누나는 태어나는 시각까지도 초시계로 재고 태어났을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동생에게, 저는 가볍게 머리를 쥐어박고 말았지만, 한편으로는 쓴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잠깐의 쉬는 시간이나 식사 시간조차 엄정하게 조율되어 있는 저의 스케줄은, 사실 선천적으로 그런 성향을 타고났기보다, 제한된 환경과 시간 속에서 얼마나 남을 앞서갈 수 있는지 분투했던 저만의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안은 극히 평범한 가정으로, 형편이 안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뛰어난 편도 아니라, 일가친척 전체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며 쳇바퀴처럼 돌아갈 뿐인 상황이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한 마리 태어날 법도 하련만, 모두가 도토리 키재기처럼 비슷한 수준으로 올망졸망 사는 생활에서 저는 남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고액 과외를 시켜준다거나 어학연수를 보내주는 등의 지원을 바랄만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저는 제게 주어진 시간과 타고난 두뇌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보다 앞서 나가는 수밖에 없었고, 일찌감치 저의 목표를 확고하게 잡고 분투하기 시작한 결과는, 학창시절 제한된 시간 속에서 저의 경지를 최대한 끌어올려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조금씩 낭비하는 시간도 허용하지 않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제 가족이나 친척들이 그렇듯 극히 평범한 수준의 등수만을 유지하고 있었던 저는, 그때부터 무섭게 성장하기 시작해 전교 상위권의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인생을 바꿔나가기 위한 본격적인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무렵이었습니다.
동생들을 돌보며 남보다 큰 책임감을 갖게 되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부터 동생들을 돌보느라, 남보다 많은 책임감으로 항상 어른스럽다는 평가를 들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또래 친구 중에는 나이가 비슷해도 집안에서의 위치는 각자 동생이거나 외동딸, 저와 같은 장녀인 아이 등 천차만별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어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격언을 왠지 떠올리게 하는 타입들이 많았습니다. 사람은 역시 끼리끼리 어울리는 모양인지, 많은 친구 중에서도 저와 특히 친한 아이 중에는 집안에서 맏이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적사항을 전혀 모르고 사귀었어도 나중에 확인해보면 대부분 비슷할 때가 많아, 정말 신기하다며 다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제 일신의 출세나 성취를 논하기보다, 동생들을 위해 빨리 사회에 나가고 싶다는 고민으로 가득 차 있던 시기키도 했습니다. 맏이기 때문에 조건없는 희생을 강요당한 게 아니라, 똑같은 공부를 하더라도 각자의 특성이나 실력에 따라 추구해야 하는 경지가 다른 만큼, 저는 공부를 오래 하기보다 일찌감치 실무 전선에 뛰어들어 일하는 것이 훨씬 성격에 맞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희 부모님은 누구에게나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으로, 저 또한 공부하고 싶은 영역이 있다면 대학까지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제가 대학에 가서 산출될 수 있는 손익과 가능성의 유무를 따져봤을 때, 투자금을 충분히 회수하지 못하리라 판단하여 취직에 대한 의지를 일찍부터 드러냈습니다.
귀여움만 받던 독자, 친구들을 통해 독선적인 성격을 고치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는 손이 귀한 집안의 독자로 태어나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한 귀염둥이였습니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조부모님과 일가친척 어른들까지 합심하여 저를 귀애해 주시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저는 어느덧 사랑받는 것이 당연한 어린아이로 자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저를 언제나 품에 싸안고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안절부절못하셨던 어른들의 태도가 당연해, 유치원에 가더라도 선생님들이 저를 똑같이 대해주시길 바랐고, 친구들과 놀 때도 제가 가지고 싶은 물건이나 음식을 먼저 독차지하는 게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촌 누나나 형들과도 나이가 꽤 차이나, 명절에 만나도 뭐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당연했던 어린 독재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제로 친구들과 다투거나 유치원 선생님의 주의를 들어도, 집에 돌아가면 제가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당연한 삶이었기 때문에 저의 문제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습니다. 친구도 만들기 어려웠고, 그렇게 다른 아이들과 맞지 않아 덜걱대는 일상을 보내며 입학하게 된 학교는, 유치원 시절보다 훨씬 많은 다수의 아이들과 지내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제게 한층 깊이 있는 고난을 선사했습니다. 제가 더는 사랑이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며, 모든 아이들과 평등한 학생 중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제 인생의 수많은 고난 중 하나였던 이 시기로 인해, 제 독선적인 성격은 조금씩 흐름을 바꾸는 물꼬가 트이게 되었습니다. 다수의 또래 친구들이 한목소리로 ‘제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준 계몽의 순간은, 또래 문화에 민감한 나이였던 제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른들이 저를 응석받이처럼 여기고 달래 주셔도, ‘제가 틀렸다’고 말해 주었던 다른 아이들의 선언은 제 머릿속에 깊게 남아 제 의식과 행동을 좌우하는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미니카 놀이를 하며 정당한 승부욕을 펼치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와 친구들의 관심을 사로잡은 유행의 핫 아이템은 단연 미니카였습니다. 정해진 조립 부품과 일정한 틀이 있지만, 어떻게 개조하느냐에 따라 본인의 개성이나 취향이 반영될 수 있고, 무게나 외관, 스피드 면에서 다양하게 손댈 구석이 있는 등, 우리는 마치 자신만의 취향대로 게임 캐릭터를 커스텀하는 것처럼 자신의 미니카를 개조하기 바빴기 때문입니다. 외관 디자인이나 색깔, 바람의 저항을 최대한 받지 않을 손질에도 신경 쓰고, 얼마나 오리지널 아이템과 차이를 크게 두는 개조가 가능한지 등, 각자 서로의 미니카가 압도적인 차별점을 가지도록 논의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을 들였습니다. 자기 존재를 두드러지게 부각해 주목받고 싶은 어린애의 본능은, 아이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기록을 내는 미니카를 만들어내고 싶은 쪽으로 관심이 자연스럽게 기울었기 때문입니다.

개중에는 정당한 승부를 포기하고 스피드 대신 중량감이나 상대를 부수기 위한 장치 부착에만 몰입해, 처음부터 반칙으로 상대의 미니카를 망가뜨릴 요량으로 승부에 나서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정당한 승부로 쟁취하지 않은 승리는 의미가 없다며 친구들 사이에서 거듭 말이 오가곤 했지만, 본인의 미니카가 망가지고 불합리한 패배를 감내하게 된 아이들은 무척 좌절하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기계 관련 업종에 종사하셔서, 각종 구하기 힘든 부품을 공수할 수 있었던 저는, 누구보다 압도적인 스피드를 추구하는 부품의 개조에 매진하여, 정상적인 제품으로는 거의 만들어내기 어려운 속도에 도달하며, 억울하게 패배한 아이들의 복수를 대신 해주기도 했습니다. 미니카는 모두가 정당한 승부를 내기 위해 궁리하고 노력하여 즐기는 것이 중요한 놀이인 만큼, 규율을 함부로 흐트러뜨리는 짓을 해서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자라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제가 자랐던 고장은 풍요로운 자연과 건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나가던 아름다운 지방이었습니다. 인구수가 많거나 발전이 급진적으로 이뤄진 곳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런 만큼 사람들이 욕심을 가지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만 건물을 올려, 상당수의 자연이 유지된 채로 점진적인 진척을 나아가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철없던 시절에는 그런 고향의 고즈넉함이 마냥 반갑게 다가오지 않아서, 우리는 왜 이렇게 문화와 발전의 혜택을 못 받는 곳에서 살아야 하는지 한탄하곤 했습니다. 과거 도시에 살았다가 몸이 약해져 현재의 지방에 정착하는 원인이 되셨던 어머니는, 그런 저의 하소연을 무척 안쓰러워하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번화가에 사는 친척이 올 때마다, 그런 저를 도시에 데리고 놀러 나가 주십사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무척 신을 내며, 무엇을 입고 갈지 고민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욕심을 앞세우지 않은 자연 조화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지만, 그때는 매일 당연하게 보고 자란 산이나 들의 아름다움이 성에 차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도시에 나가 다양한 문물을 보고 즐기는 일은 무척 신이 났지만, 맑고 깨끗한 고향의 공기에 익숙해진 몸으로 도시를 한참 돌아다니는 일은 상당히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거칠 것 없는 고향에서 살다가, 사람과 자동차에 건물로 북적북적한 도시에 발을 내딛는 순간, 매번 숨이 묘하게 막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 여기에만 오면 얇은 막이 씌워진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될까? 그 시절, 도시 발전과 고향의 차이가 그렇게나 극명한 느낌을 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저는, 그저 골똘하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시골풍경을 그리는 화가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가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돌보실 때면, 일을 도와드리는 짬짬이 스케치북을 펼쳐 다양한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기를 좋아하던 아이였습니다. 눈에 크게 띌 만큼 놀라운 재능은 아니었지만, 흙투성이 손을 하고서도 한쪽에 둔 짐에서 주섬주섬 도구를 꺼내 제법 솜씨 좋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열정이, 아버지의 눈에는 다소 생경해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 집안에서 화가가 나올 모양이라며 저를 띄워주시는 아버지의 칭찬을 듣는 일은 쑥스러웠지만, 언젠가 저희 동네와 같은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전문으로 담아내는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뛰곤 했습니다. 친척들이 사는 대도시에 비하면 교육이나 많은 경험의 기회가 한참 모자랄 수밖에 없었던 저는, 오로지 저의 끈기로 조금씩 발짝을 떼어 나아갈 수 있었던 그림의 세계만이, 유일하게 다른 아이들을 압도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저의 열의를 인정하시고, 일찌감치 저를 넓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한 준비에 골몰하셨습니다. 대를 이어 살아온 토지에서, 상당한 재산과 규모의 농사를 벌이며 살아오신 아버지였지만, 자식을 일찌감치 밖으로 내보내 오랜 세월 교육 하고자 지원하는 일은, 상당한 계획과 금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저는 혼자 집을 벗어나 대도시로 올라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때부터 이미 저를 해외로 유학 보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을, 저는 뒤늦게 전해 듣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지방에서 흙과 함께 평생을 살아오신 아버지께는 저를 도시로 내보내는 것만 해도 충분한 모험이셨을 텐데, 설마 그 이상의 경지까지 계산하시며 저를 내보내신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버지께 평소 품고 있던 존경심이 더욱 깊어진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맡게 된 가정 가계부 복사하기
부모님께 마냥 응석 부릴 수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제 의무나 책임에서 도망가지 않고 제대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 시기였습니다. 친구들은 아직 미숙한 감정 상태로 울고 웃으면서 그저 성장에만 매진할 수 있는 처지였지만, 저는 오랫동안 저를 당연하게 품어왔던 둥지의 유지를 위해 발 빠르게 여기저기 나서야 하는 입장의 어린 새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위기를 마냥 인생의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저를 더욱 튼튼하게 자라도록 하는 세상의 시험이라 생각하며, 고난을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또한, 아직 어린 동생만큼은 순수하게 키워주고 싶은 욕구의 발현이기도 했습니다.

용돈 기입장을 쓰고 은행에 저금하는 것도 귀찮고 지겨워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매일 가계부를 쓰고 보험이나 통장을 관리하는 역할을 도맡는 것은 상당히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성인이 아닌 이상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이모의 도움과 아버지의 명의를 빌리는 등, 주변 어른들의 이해심 깊은 서포트가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뒤늦게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아직 성인이 되지도 못했던 딸에게, 어떤 배짱으로 집안 재정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기실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아버지의 배포 덕분에, 저는 일찌감치 금전과 재정에 대한 실전적인 지식을 쌓아갈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미숙하여 실수하면 어떻게 됐을지에 대한 불안이 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저를 배려해주신 아버지의 결단력에 대해서는 지금도 감사하고 있으며, 저 또한 아버지에 대해 믿음으로 응해 드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용기를 갖고 친구들의 선입견을 깨다 복사하기
시골에서 갓 올라온 상태로, 주변 아이들과의 괴리감을 좁혀 나가기가 상당히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말투나 습관, 보고 자란 풍경의 차이는 당연하거니와, 장래나 입시를 준비하며 방과 후까지 공부하는 것에 익숙해진 많은 아이와 다르게, 항상 집 밖을 나가 쏘다니던 저의 생활은 느낌이 무척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처음 상경해 올라올 때부터, 화려하고 사람 많은 도시의 압박감에 주눅이 들어 있었던 저는, 아이들이 저의 사투리나 행동을 재미있어하며 구경할 때마다 몹시 위축되곤 했습니다. 저와 상당히 동떨어진 성장 배경에서 자란 아이들 사이에 섞여 주목받는 일이란, 왠지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그런 저의 처지를 걱정하셨지만, 이제 막 궤도로 올라간 사업의 서포트를 위해 전력을 다하셔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저를 달래고 상담해주시는 일 외에 구체적인 도움을 받기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상황이 저의 주체적인 의지를 부추겨, 다수의 아이와 저의 차이에 겁먹지 않고, 차근차근 적응을 시도하게 하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제게 만약 등 비빌 구석이 있었다면 그 권위에 무조건 의지했을 것이나, 마치 배수진을 친 것처럼 물러날 곳이 없다는 의식은, 저로 하여금 스스로 전진을 택해야 하는 의무감을 발휘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누군가의 등 뒤에 숨어 상황을 그저 절망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제가 해낼 수 있는 일을 찾아 용기 있게 전진한 결과, 저는 친구들의 선입견을 극복하고, 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도시로, 도시의 원리를 파악하고자 노력하게 되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는 부모님의 사정으로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조부모님 댁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문명의 혜택을 받기에는 다소 거리가 먼 지방이라, 학교만 다녀오면 조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며, 그야말로 농촌 아이처럼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부모님은 가끔 저를 만나러 오실 때마다, 저를 위한 책이나 장난감을 사오시곤 했지만, 저는 이미 농촌 생활에 완전히 길들어, 집안에 있기보다 밖을 쏘다니며 노는 것을 훨씬 즐기는 아이였습니다. 그 시절에 개발된 어떤 게임이나 책도, 밖에 나가 실제로 고기를 잡거나 열매를 따면서, 벌레나 새 등을 관찰하는 재미에 따르지 못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업이 조금씩 궤도에 오르면서, 서울에 올라와 살게 된 제가 맞닥뜨린 모든 기술과 문명은 가히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시골보다 자연환경이나 자유롭게 뛰놀 만한 곳은 한참 모자랐지만, 그 부족함을 상쇄하는 편리한 기계와 기술이 곳곳에 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사주신 컴퓨터는 있었지만,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던 예전과 다르게, 저는 핸드폰과 컴퓨터를 통해 또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교류를 꾀하는 온갖 놀 거리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갓 상경해 바라본 도시는 무척이나 삭막해 보였지만, 사람들은 외부로 펼쳐진 자연이 아닌, 실내와 건물로 조성된 문명에서 최신 기술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린 시절부터 접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살았던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저는 매일 마주하는 모든 현상과 체험이 온통 두근대고 떨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풍경이 그저 마법 같을 뿐이었지만, 차츰 익숙해지고 난 다음부터는 구체적인 원리와 정체를 파악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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