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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정 (3,7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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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 복사하기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활달한 성격 덕분에 학교를 다니는 동안 다양한 모임과 동아리에서 학우들을 리드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고, 학우들의 의견을 모으고 동의를 얻어내는 일을 좋아하여, 어떤 모임이나 동아리에서도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소 소란스럽고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저의 단점을 걱정하셨던 부모님께서는 가족끼리 산과 강을 찾는 여행을 자주 하면서 자연을 접하도록 배려해주셨습니다. 가족 여행을 갈 때에는, 항상 저에게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게 하셨고, 여행지에 가면 제가 그곳에 대한 정보를 부모님께 설명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하기도 싫고 준비하는 과정이 귀찮았지만, 인터넷으로 검색한 정보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또 다른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서, 차츰 여행준비를 점점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여행 중에서도 특히 낚시가 취미였던 아버지를 따라, 낚시터를 자주 갔습니다. 아무 말도 업이 몇 시간씩 낚싯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처음에는 지루하고 답답했는데, 차츰 자연의 소리와 자연의 색을 듣고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낚시를 통해 차분히 생각하는 법과 참고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낚싯대를 만지작거린다고 해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매사에 차분히 준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낚시터에서 배웠습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처럼, 항상 원하는 일에 대해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경험과 적응력 복사하기
<경험과 적응력>
부모님의 주도로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자주 갔습니다. 여행을 갈 때에는 온 가족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도 제 짐은 제가 스스로 꾸렸고, 나라마다 체험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뉴질랜드에서는 번지점프도 뛰어보았고, 필리핀에서는 스노클링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다양한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덕분에 저는 어린 시절부터 태권도, 피아노, 수영, 마술 등 하고 싶은 것을 다양하게 배우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저는 새로운 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낯선 곳에서도 잘 적응하며, 어디서나 활기차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친구가 많고 대인 관계의 폭이 넓었습니다. 학창시절 반장, 부반장을 맡아 리더십을 키웠고, 이를 통해 직책과 임무가 주어졌을 때 적극적으로 책임을 완수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에는 대전에서 서울로 전학하여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서는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성격이 좋은 역할을 하여,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 쉽게 친해지고, 서울에도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하기 시작하여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접했습니다. 일을 빨리 익혀 항상 윗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회에서 새로운 만남을 통해 맺는 인연들도 귀한 재산으로 여기며, 지금까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놀면서 자라다 복사하기
<놀면서 자라다>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가장 오래 남아 있는 것은, 일찍 퇴근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아버지와 산책을 하다가 근처 초등학교 놀이터에서 철봉과 시소를 타며 놀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밖에서 놀면서 크는 게 가장 건강하게 크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말이면 항상 아버지를 따라 등산하러 다니곤 하였습니다. 어린 저를 데리고 등산을 할 때, 아버지는 제가 힘들어할 때마다 자주 쉬어 가더라도 정상에 오르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등산을 하면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항상 먼저 인사를 건네고, 싸 간 음식은 나눠 먹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힘든 순간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시원한 풍경을 감상하면서, 아버지는 ‘저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맘껏 뛰어 놀아라’는 말씀을 곧잘 하셨습니다. 제가 학년이 높아져도 밖에서 놀아야 한다는 신념에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밖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아버지를 따라 등산과 자전거를 즐기면서 체력도 강해졌고, 활달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등산을 통해 인내심을 배웠고 정상에 오르겠다는 의욕을 불태우며 승부욕도 강해졌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마냥 ‘놀아라’는 말이 좋았지만, 그것이 건강하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음을 커서는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삶이 고단할 때에는 산에 올라 손톱만큼 작게 보이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미적 감각, 요리 감각 복사하기
<미적 감각, 요리 감각>
어릴 때부터 그리고 만들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말을 간신히 할 때부터 손에 잡히는 펜이나 크레파스, 색연필 등으로 아무 데나 그림을 그리곤 하여 어머니가 여간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파, 방바닥, 벽을 막론하고 어디에나 저의 펜 자국이 묻어있을 정도였습니다. 아무 데나 그리지 않도록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습니다. 어머니의 해결책은 제 손이 닿는 모든 벽에는 종이를 붙여 제가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들이기까지 수년간 우리 집 벽은 낙서투성이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학교에 다니는 동안 가장 좋아했던 것은 미술 시간이었습니다.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를 좋아하여 미술 시간에는 항상 가장 돋보이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방과 후 수업에서는 이런 재능을 더 살릴 수 있는 다양한 공예수업을 들었습니다. 리본공예, 지점토 공예, 그리고 도자기공예까지 손으로 만들고, 그림을 그려 채색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는 남다른 재능이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께서는 저의 학업 뒷바라지를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셨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에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은 저에게 아주 기분 좋고 든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살림에 집중하게 되신 어머니는 사실 요리에 소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요리학원에 다니게 되셨는데, 집에서 곧잘 실습하셨습니다. 책을 보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한식조리사 자격증 실습에서 여러 번 낙방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중3 겨울방학에 어머니와 함께 조리사 자격증에 도전하기로 했는데, 어머니보다 제가 먼저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하시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시작한 것이었지만, 직접 요리를 해보면서 요리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종종 요리를 직접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요리하는 시간이 좋았던 것이었지만, 푸드 에디터라는 직업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바로 그때 요리를 즐거워했던 경험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립심을 키워준 성장과정 복사하기
<자립심을 키워준 성장과정>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부모님과 든든한 형으로부터 넉넉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위암으로 수술을 받고 힘든 시기를 견뎌내신 아버지는 이제 건강을 회복하셔서 건강관리에 노력하며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병시중으로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고, 두 형제를 키우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형과 저는 또래들에 비해 조금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항상 좋은 것은 저희 형제들에게 양보하고 힘든 내색 없이 일하시는 부모님을 통해, 사랑과 배려를 배우며 자라서 저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성격 덕분에 주변에는 항상 친구가 많았고, 학교생활에도 모범적인 학생으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대학 진학을 앞두고 학비를 스스로 벌어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등록금까지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부터 페스트푸드점 홈서비스 배달을 하며 가까스로 대학등록금을 마련하였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는 제대 후 쓸 용돈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래를 위한 저축을 했습니다. 군에서 받는 월급도 꼬박꼬박 모았고 제대 후에는 그 돈으로 부모님께 선물을 해드렸습니다. 제가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더 치열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복사하기
<자기의 일은 스스로>
부모님께서 음식재료 도매점을 운영하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집에 항상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도록 독립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집안일도 조금씩 나눠서 맡아 하였는데, 남녀의 차별은 없었습니다. 누나가 있었지만, 각자의 방은 각자가 청소해야 했고, 빨래는 빨래바구니에 담아 매주 당번을 정해 세탁기를 돌리고 마른빨래를 정리하였습니다.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은 함께 가꾸고 돌볼 줄 알아야 하며, 이것이 나중에 사회생활에서도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교육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부모님의 가르침 덕분에 작은 일에도 책임감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운동을 좋아해서 중학교 때까지 검도를 했습니다. 특히 중학교 때에는 검도 동아리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동아리에서 주장을 맡아 검도시합에 출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입시에 대한 압박 때문에 계속 하기는 어려웠지만, 가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도장을 찾곤 하였습니다.

대학교 때에는 부모님의 음식재료 도매점 일을 도와 용돈을 받았습니다. 공사구분이 철저하신 부모님이었기 때문에 부모님 밑에서 일을 한다고 해서, 특별대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하시는 아저씨들과 같이 물건을 실어 나르고, 물품 납품도 해보았으며, 다른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한 영업도 경험해 보았습니다.
부모님께서 일하시는 곳에서 거래처 손님들을 대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항상 웃음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 사람들을 대하는 예절의 기본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체력과 예의 복사하기
<체력과 예의>
어릴 적부터 예의와 체력을 중요시하는 아버지의 교육 방식 덕분에, 운동을 즐겨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작은 부분이라도 배려하려 노력하였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들로부터 ‘경우가 바르다’는 칭찬을 자주 들을 수 있었고, 어떤 조직에서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약 8년 계속했던 운동부 생활은 현재의 저를 만들어준 거름이었습니다. 유도라는 스포츠를 통해 단체생활을 하면서 선/후배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개인적인 행동으로 전체 유도부의 이미지를 나쁘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항상 언행을 조심하게 해주었고, 인간관계의 중요성도 알게 해주었습니다.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에는 팀 내에서 주장을 맡아 운동부를 이끌면서 희생과 배려 협동심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전국대회에서 출전하여 2위로 입상하여 학교의 명예를 빛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의 수상으로, 그동안 열악했던 운동부의 지원을 끌어올리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체력과 예의를 기본으로 갖추고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함에서도 어떤 조직에서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잘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꿈, 빵집에서 행복을 느끼다 복사하기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안정적으로 다니시던 직장을 포기하고, 예전부터 꿈꿔 오신 빵집을 차리는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제빵사의 꿈을 가지고, 작지만 소박하고 맛있는 빵집을 차리고자 했던 소망을, 제빵학과를 다니던 도중 가세가 기울어져 집안을 도맡게 된 후부터는 완전히 포기하고 사시다가, 불현듯 다시 자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결단 뒤에는, 언제나 꾸준한 응원을 보내셨던 어머니의 존재가 있었습니다. 결혼 전에는 계속 집안을 뒷바라지하는 중압감에 짓눌려 사시고, 결혼한 후에도 저와 어머니를 돌보느라 회사원의 길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당장 생활이 불편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선택을 언제나 응원하고 있겠다며 열렬한 지지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동안의 적금과 퇴직금을 모아 아버지가 꾸리신 빵집은 작지만 소박한 맛이 있었고, 저는 아버지가 매일 아침마다 양복 입고 서류가방을 드는 대신, 편한 차림으로 빵집에 출근하시는 모습을 약간 낯설어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익숙해져 아버지의 주방을 부지런히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정직한 재료와 맛으로 승부하는 아버지의 빵은, 오랜 세월 변함없는 꾸준함으로 친가와 저희 가족을 뒷받침해오신 아버지를 닮아 있었습니다. 가게 근처에 딸린 집을 구하느라 이사까지 했던 저희 가족의 생활반경은 다소 좁아졌지만, 저는 예전보다 작은 방이라도 아버지가 직접 구운 향긋한 빵 냄새와 함께할 수 있어 언제나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사람의 기쁜 얼굴이 무엇인지, 저는 매일 일하러 나가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아버지처럼 현실에 굴하지 않고 제가 진정 원하는 바를 찾고 싶다는 결심을 했을 정도로, 아버지의 결단은 제 유년기에 무척이나 인상적인 한 획을 그어 주었습니다.
몸 약했던 어리광쟁이, 조기유학으로 어른스럽게 변화하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부터 저는 어머니가 없으면 일단 울음부터 터뜨리던 엄청난 응석받이였습니다. 갓 태어났을 시절 몸무게가 심각하게 모자라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던 탓에, 미숙아로 태어난 영향으로 항상 아프거나 칭얼대기 바빴던 제 곁을 어머니는 항상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양가 있는 음식과 약으로도 모자라, 몸에 좋은 보약과 약재라면 뭐든 공수하고, 작은 증세라도 있으면 병원 검진을 게을리하지 않는 등, 어린 시절의 제 생존에는 집안 전체가 매달려 애를 태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독립심을 키우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져, 유치원에 들어가고 나서도, 끊임없이 어머니를 찾으며 응석을 피우는 곤란한 아이로 자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몸이 보통 아이들처럼 튼튼해지고 나서도 저의 그런 버릇은 변함이 없어, 온전한 어른으로 자라지 못할까 봐 걱정하시게 된 어머니께, 아버지가 권하셨던 대책은 바로 저의 조기 유학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주 왕래했던 친척분께 맡겨질 예정이었기에, 홈스테이나 하숙과는 사정이 달랐지만, 한시도 어머니와 떨어져 본 적 없었던 제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기는, 저의 어리광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됐을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었던 것입니다.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아무리 떨어뜨려 놓는다고 해봤자, 어떻게든 만날 것이기에 강력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아버지의 선택에 따라, 학생 때부터 갑자기 집에서 떨어져 나와 지내야 했던 제 유년기는 참으로 파란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어른에게 마냥 의존하지 않는 어른스러운 성격으로 자랄 수 있었지만, 그 방법이 참으로 극단적이었던 만큼 나름의 굴곡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제때 가지치기를 하지 못하고 볼썽사납게 자라고 있었던 저를 알맞게 처치해준 약이 아니었나 가끔 생각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리광 많은 성격을 고치게 된 계기 복사하기
어린 시절, 어머니의 채근으로 쓴 약을 먹고 나면 언제나 달콤한 사탕을 찾아 주방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에서는 ‘맛있다’는 말에 붙는 한자가 ‘달다’는 뜻이 있을 만큼, 단맛은 인간의 본능에 가장 깊숙이 배여 있는 쾌락이기도 합니다. 그 본능에 어른보다 더욱 감정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은, 자연스럽게 저한테 따끔하고 쓴 충고를 해주는 친구나 어른을 선호하기보다, 무조건 좋은 말과 환심을 사려는 상대를 더욱 좋아하던 시기였습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는 말이 있어도, 저는 어떻게든 그 열매만 꼼수로 먹을 수 없을까 고민할 만큼 쓴맛을 싫어하던 아이였던 것입니다. 제가 잘못한 게 있어도 타박하며 질책하기보다, 저를 그저 무조건 감싸주기를 바랐던 저는, 말하자면 상당히 어리광이 많은 타입이었던 셈입니다.

외동딸로 오냐오냐 자라 그런 저를 컨트롤해줄 사람이 제대로 없었던 유년기에 처음으로 태클이 걸렸던 것은, 옆집에 새로 이사 온 남자아이의 존재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남자가수를 닮아 처음 만날 때부터 호감이 갔던 그 아이는 무척 어른스러운 성격으로, 무조건 어리광을 부리고 뻗댈 줄만 알았던 제게 “너 정말 어리구나.” 하는 일침을 가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기분이 되어, 그 아이를 피해 다녔지만, 같은 학교에다 같은 반까지 되어버린 그 아이의 시선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다투거나 잘못할 때마다, 집 앞에서 저를 마주치면 제가 뭘 잘못했고 친구한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조목조목 짚어주는 목소리를 들어야 했던 기분은, 상당히 참담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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