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배경 및 가치관] 자유로운 가정 분위기와 주도적인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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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가정 분위기에서 자란 저는 제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강조하셨고, 제가 선택하는 삶인 만큼 저의 책임이 누구보다 막중하다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에 적극 지원해주셨고, 제가 하고 싶은 것이 생기도록 기회를 제공해주셨습니다. 강압적이지 않은 분위기에서 제가 스스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이러한 교육 방식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스스로 흥미를 느껴 한 공부였기에 중도에 포기하지도 않았고 학습 효율이 뛰어났습니다. 저희집에는 특이하게도 컴퓨터와 티비가 없었습니다. 철저히 책으로부터 지식을 얻게 하신 것도 부모님의 특이한 교육방식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컴퓨터를 가지게 된 것은 고1때였습니다. 넘쳐나는 정보를 걸러낼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올바른 정보를 습득할 수 없다며 부모님은 책을 통해 지식을 얻을 것을 강조하셨고, 이는 자유로운 교육방침을 내세우시는 부모님이 부탁하신 몇 안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스스로 제 삶을 개척하는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저는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혼자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해보지 않은 것에 도전하는 것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분명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고,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과학에 흥미가 많았던 저는 수학, 과학 영재 학급에서 심층 수학, 과학을 배웠습니다. 과학에도 흥미가 있었지만 인문학에도 흥미가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정리하고 감상평을 작성하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도 좋아했던 저는 고등학교에서 인문계열을 선택해야할지 자연계열을 선택해야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인문, 자연 모두에 흥미와 재능이 있는 점이 제가 통계학을 전공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과 자연이 혼합되어 있는 통계학은 저의 흥미를 모두 만족시키는 학문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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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배경 및 가치관] 만물 박사였던 아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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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별명은 '만물 박사'입니다. 어린 시절 제게 아버지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에는 모르는 것이 없는 아버지가 신기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손재주가 있으셔서 집의 가구 등을 직접 제작하시기도 하였고, 악기도 잘 다루셨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지 저도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특출나게 잘 하는 것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피아노, 바이올린, 플롯 등의 악기를 다년간 배웠으며 미술학원도 여러해 다녀 예술적 감각을 갖췄습니다. 잘한다는 평가는 들었지만, 아주 잘한다, 최고다. 라는 평가는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학업 성적에 있어서도 나타났습니다. 모든 과목을 골고루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잘난척을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드실지 모르나 고등학교 때 저는 이 문제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하게 잘하는 무언가가 없다는 것은 제가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고민을 아신 어머니는 제게 생각을 바꿔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잘하기는 힘들다라는 말씀을 해주시며 다방면의 재능이 언젠가는 합해져 저만의 특징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이후 저는 여러 가지에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 가지만을 잘 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모든 방면에 뛰어남을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마케팅 기획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인 것 같습니다. 특히 예술과 관련한 마케팅을 떠올리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예술적 감각을 바탕으로 최고의 마케팅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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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배경 및 가치관] 차이가 경쟁력을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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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똑같아서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똑같은 옷을 입은 친구를 마주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같은 물건을 쓰거나 제가 낸 과제가 친구들과 차별화되지 않으면 스스로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옷은 다른 것으로 갈아입으면 되고, 같은 물건은 쓰지 않으면 되지만, 성적이나 성과로 만드는 것들에서 차이를 만들려면 늘 저만의 다른 포인트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하나의 차이점, 차별화되는 포인트를 찾으려 저는 그래서 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고민하고 조금 더 노력하며 스스로의 성과가 특별함을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이런 경쟁심, 그리고 노력은 자연스럽게 성과로 나타났고 이런 부분이 하나둘 쌓여 지금의 제가 있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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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배경 및 가치관] 늘 바쁘셨던 부모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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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에서 장사하시던 부모님은 늘 바쁘셨습니다. 할머니께서 바쁜 부모님 대신 저희를 돌봐주시긴 했지만, 어쨌거나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할 일은 스스로 해야 하는 '스스로 정신'이 자연스럽게 길러졌습니다. 덕분에 저는 어릴 때부터 '애어른' 소리를 들으며 의젓하고 책임감 있는 아이로 자랐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늘 바쁘시고 가끔 쉬는 날에도 그간의 피로로 인해 쉬는 일에 집중하셨지만, 그 와중에도 이런 힘든 일상을 그분들이 왜 견디시는지, 그리고 장사, 상인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늘 저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부모님이 일상을 견디는 힘은 이런 것들이 저와 제 동생을 공부시키는 밑천이 되고, 우리가 진학하고, 또한 하고 싶은 것들이 있을 때 해 줄 힘이 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또한, 이런 현실적인 이유로 장사하고 계시지만 장사라는 것이 그냥 물건을 파는 행위가 아니라 오래 하시다 보니 결국 신뢰를 파는 일이라는 것도 말씀해주셨습니다. 부모님은 부모님이 하시는 일이 남들 보기에는 하찮을 수 있지만 두 분께는 정말 중요하고 보람 있고 몸은 고되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도 이런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며 비록 다른 부모님들처럼 같이 있어 줄 시간도 별로 없고 주말도 휴일도 별로 없이 일하시지만,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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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배경 및 가치관] 강직한 성품의 아버지를 닮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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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강직한 성품을 가진 분입니다. 세관으로 근무하셨던 40년 동안 한 번도 물건을 빼돌린 적도, 돈을 거래한 적도 없으십니다. 그런 유혹을 숱하게 받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사과 상자에 돈을 들고 저희 집에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의 그 풍경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자주 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늘 단칼에 거절하셨고 그분들과 인사도 잘 하지 않으셨습니다. 원리와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아버지께서는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원리로 삼으신 후 절대 어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강직한 성품의 아버지를 닮아 어떤 일을 해도 남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학생 때 제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잘못했다고 자진 신고를 하고 벌을 받았습니다. 학원에 다닐 때도 학원 선생님께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직하게 숙제를 했습니다.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특히 어른들께 신뢰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제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저에게 묻곤 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반장을 도맡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제가 느끼기에 그때 불의가 있으면 참지 않고 항상 진실을 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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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배경 및 가치관] 넓은 세계를 동경했던 어린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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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저는 세계 지도에 너무나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는 한국에 다소 답답함을 느끼던 아이였습니다. 미국이나 중국 등의 나라는 땅덩이가 드넓어, 지구본이나 세계 지도의 어디에서 찾더라도 단번에 드러날 만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대개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일단 위치를 상정하고 그 밑으로 쭉 내려간 후에야 그 형상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지도로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렇게 크나큰 존재가, 세계 단위로 보면 왜 그렇게 작게만 느껴지는지 속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평생 한국에서 태어나 밖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살게 된다면, 얼마나 협소한 시야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의 일화처럼 말입니다.
인터넷과 TV의 발달로 인해, 직접 그 나라에 가보지 않더라도 간접적인 경험과 체험을 할 만한 기회는 점차 늘어나고 있었지만, 저는 외국을 다녀온 사람들의 대다수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입을 모아 말할 때마다, 왠지 모를 궁금증이 피어나곤 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자료를 수집하고 찾아보는 모든 노력들이, 결국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직접 한 번 가서 구경해보지 않으면 한없이 빈약하고 부족한 경험일 뿐이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왠지 모를 좌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은 가족여행으로 외국에 갈 수 있을 만큼 형편이 넉넉한 쪽도 아니었기에, 저는 그저 막연한 호기심과 탐구심을 제 가슴 안에 담아놓은 채로, 언젠가는 외국의 문물을 마음껏 만끽해보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며, 조금씩 성장을 향한 나름의 발돋움을 해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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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배경 및 가치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도우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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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저를 성장하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 저는 장애우 친구와 짝을 맺어 3년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도왔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친구가 저를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평탄한 삶을 살면서 자칫 잘못하면 삶의 단면만 볼 뻔했는데, 그 친구의 시선을 함께 보고 함께 느끼면서 다양한 삶이 있다는 것을 느꼈고 본인이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몸이 멀쩡한 제가 봉사를 해야 하며, 멀쩡한 사람이 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봉사활동을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제 능력이 적지만 그것을 토대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또 고등학교 때는 세상에 다시없을 라이벌을 만났습니다. 1개 차이로 서로의 등수를 뒤집고, 다시 뒤집고 했던 친구를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성장해 나가면서 서로의 성적을 지켜주는 든든한 라이벌이 되어 함께 성장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에는 '틀린' 것은 없고 '다른' 것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꼈으며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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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배경 및 가치관] 화단을 가꾸시던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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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저희 집에는 항상 어머니가 곳곳마다 풍성하게 피워놓은 화단과 온갖 채소들로 가득한 마당이 만개해 있었습니다. 철마다 색과 형상을 바꾸어 화려하게 피어날 줄 아는 꽃들과, 저희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던 과일, 채소 등의 향연으로 언제나 허전하지 않은 풍요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곤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만한 풍경이 완성되기까지는 어머니의 꾸준한 노고가 필요했기에, 저와 동생 또한 때때로 어머니를 도와 드리며 함께 마당에서 열심히 일을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도와 드리며 수확한 채소나 과일들은, 왠지 더욱 맛있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마법이 걸려 있기도 했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키웠다는 애정이 함께 들어가, 저의 입을 더욱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를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제가 무척이나 작고 어리던 시절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마당 한구석에 심어 놓았던 나무가, 그 키를 부쩍 키워 나가 저의 몸집을 까마득히 뛰어넘는 수준까지 자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씨앗이나 모종에 불과했던 꽃과 나무들이,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며 언제나 남다른 성장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저 또한 그에 지지 않고 나름의 성장세를 보여주고 싶다는 의욕을 북돋우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는 제가 꾸준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너무 힘들고 지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는 기분으로 늘어지다가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식물들을 볼 때면, 인간인 제가 그 경쟁에 밀려나고 싶지 않다는 오기로 울컥하는 마음을 가지며 다시 도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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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배경 및 가치관] 외국에 나가보고 싶은 소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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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제가 처음 세계지도를 마주하고 우리나라를 찾아보았을 때의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거대한 세계의 크기와, 그에 비하면 한없이 작을 뿐인 우리나라의 형상은, 어린 저를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집 주변 골목에서 종종 길을 잃을 때면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고, 시골 할머니 댁에 내려갈 때마다 한도 끝도 없이 이어져 있던 도로로 인해 그만큼 길어 보일 수가 없던 저의 나라는, 세계에 비하면 지나치게 보잘것없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훗날 우주의 개념을 알고 나서는, 우리나라의 기를 한없이 죽여 놓는 지구 또한 태양이나 우주에 비하면 한없이 모자라다는 상대적 개념을 알고 나서, 한동안 혼란으로 인해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크기만 해도 저한테는 한없이 크게 느껴지는데, 세계지도에서 나름의 존재감을 발산할 만큼 거대한 땅덩어리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득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렇게 한동안 고민을 하던 제가, 외국에 나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저희 집은 외국에 나갈 만한 형편이 못 되었지만, 아버지 쪽 친척이 외국에 살아 몇 차례 외국을 방문해본 적이 있다는 외사촌 누나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며, 저는 제가 미처 체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의 지평에 대해 언제나 치밀한 관심을 기울이곤 했던 것입니다. 비록 제 몸으로 직접 경험해볼 수는 없어도, 여행책 속에서의 정보나 지도, 갖가지 사진 등으로 어떻게든 간접 경험을 해보고자 한동안 아등바등 대는 모습을 보여줬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 시절의 제게는 나름 절실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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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배경 및 가치관] 마지막까지 버티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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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을 줄 알아야 비로소 성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아이였습니다. 그 시절의 제가 가장 좋아했던 만화영화 주인공의 단골 대사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모험이 순탄치 못하고, 배신이나 갖은 위기를 맞으며 고통을 느낄지언정, 악당들이 혀를 내두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다시 칠전팔기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주인공은, 마침내 눈부신 승리를 거두며 모두의 감탄을 사곤 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그처럼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은 그렇게 멋있지만도 않았고, 온갖 고생이나 가련한 모습으로 점철된 순간이 많았지만, 그처럼 힘겹게 이겨내고 자신을 연마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최후의 승리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더 또한 주인공처럼 악바리 근성으로 끝까지 매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곤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크게 좋지 않고, 다소 노력으로 커버해야 할 때가 많은 평균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더욱 근성을 불태우며 '나도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거두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순간의 실패나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너머에 자리 잡고 있을 눈부신 미래를 바라볼 줄 알았던 저의 시선은, 다른 아이들에게 밀리고 뒤처지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버티는 사람은 나다'라는 자신감으로 제가 끝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만화영화 속 주인공이 그랬듯 때때로 저 또한 '다 그만둘까' 하는 괴로운 자책감을 느낀 순간도 있었지만, 도중에 포기해 버린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의미 없어진다는 생각은, 저를 다시 일어서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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