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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 구성항목

성장과정 (3,7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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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한 기억력으로 사람 관계를 다져나가다 복사하기
아버지가 알려주신 ‘키워드 꿰맞추기’ 방법으로 교우 관계를 다져나가기 위해 노력했던 시기였습니다. 아버지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계신 덕분에,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에 관련된 키워드나 지금까지의 축적된 기억이 전부 펼쳐져 보인다고 하셨지만, 저는 그만한 능력이 없었으므로 필사적으로 그 사람의 인상이나 관련된 사건을 압축하고 부피를 줄여,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 명확하게 떠오르는 정의로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의 정보는 곧 현재를 말하며, 미래까지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새겨들으며, 저는 과거의 발화를 통해 그 사람이 현재 바라는 니즈와 장차 장래에 선택하게 될 길에 관련된 데이터를 뽑아내고자, 언제나 머리를 굴리고 다녔습니다.

사람의 행동은 의외로 틀에 박힌 듯 뻔한 것이라,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아이들의 패턴을 발견할 때쯤이면, 사람의 삶에 크나큰 변화가 그리 쉽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마치 매일같이 반복되는 게임 캐릭터의 일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직 사회에 나가 비교적 생활 사이클이나 언행이 단순할 수 있었던 아이들로, 아버지의 방법을 시험해본 것은 제법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각자의 행동이나 과거 발언, 취향 등을 기억해주면, 아이들은 대개 놀라고 쑥스러워하면서도 타인의 그런 관심을 마냥 신기하고 반가운 호감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창시절 공식이나 요약정리를 외우던 습관처럼,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새겨 넣었고, 단지 머릿속 부피를 차지하기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적극적인 활용에 나서곤 했습니다.
부모님에게, 동생에게 좋은 자식이자 형이 되기 위해 노력하다 복사하기
저의 처신으로 인해 부모님이 괜한 말을 듣지 않으시고, 동생에게도 영향이 가지 않게 하려고 항상 성실하게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 저는 더부살이로 사춘기 시절을 보내면서, 제가 마음대로 하루하루를 보낼 형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순진해 물정을 모르고 해맑을 뿐인 동생을 위해서라도, 저는 책임감 있게 움직여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했고, 식당 일로 힘들게 일하시고 돌아오는 어머니께는 든든한 집안의 기둥처럼 느껴지는 아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타지로 돈 벌러 나가시기 전에, 집안의 기둥으로서 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입시 공부는, 제가 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리고 장차 함께 집안을 일으켜 나가기 위해서도 가장 필수적인 덕목이었고, 저는 입시에 매진하는 어떤 또래 친구들의 열정보다 더욱 깊이 있는 갈망으로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학생의 본분인 공부에 매달려 어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라도, 제게는 깊이 몰두해야 마땅한 분야였던 것입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생활 대부분을 공부에 투자하는 일은 무척 힘들었지만, 그런 저를 대견하게 여기시는 어머니나, 저처럼 공부 잘하고 유능한 학생이 되고 싶다는 동생의 선망을 들을 때는, 어깨가 으쓱거려지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좋은 대학에 장학금을 받아 진학하고 싶다는 저의 현실적인 목표를 향한 고삐는 늦추지 않았습니다. 타지에서 가족을 위해 일하고 계실 아버지께도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고자 노력했던 성과가, 마침내 대학 합격으로 돌아왔을 때는 무척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눈치 빠른 행동으로 미움받지 않는 것 복사하기
어린 시절, 친척 집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겪어야 했던 저의 인생 미션은 ‘눈치 빠른 행동으로 미움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멀리 돈 벌러 떠나시게 되면서, 저와 어머니, 동생은 큰아버지 댁에서 당분간 신세를 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정 모르는 동생보다 비교적 많이 자란 편이라, 부모님 사이의 일이나 세상에 대한 눈치 또한 나름 발달해 있었던 저는,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제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손때 묻은 가구 또한 팔게 되면서, 소중한 물건 몇 가지만 챙긴 단촐한 짐으로 큰아버지 댁에 이끌려 와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동생이 ‘소중하다’며 챙긴 짐들이 죄다 보잘것없는 물건들뿐이라, 조금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 어렸던 동생은, 유치원에서 수련회 가듯 잠시 큰아버지 댁에서 모두 같이 합숙하며 사는 것뿐이라고 하는 설득에도 잘 넘어왔을 만큼, 순진한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동생의 몫까지 대신 챙기며 형답게 굴어야 했고, 어머니가 근처 식당 일을 구해 일하러 나가신 동안 집안에서 항상 긴장을 놓지 않았습니다. 큰아버지 부부와 사촌 형, 동생들은 천성이 너그러운 편이라 우리에게 별다른 험담을 하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신세 지는 쪽에서 더욱 굽히고 들어가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저는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신세 지는 입장으로서 감사 인사는 항상 모자라지 않게 표현하고, 빠져야 할 때는 적절히 빠지는 등, 큰아버지 댁에서 지내던 시절의 일상은 마치 살얼음을 밟는 하루하루와도 같았습니다. 쓸데없이 노닥이거나 사고 치지 않고, 공부에도 성실히 열중하며, 어른들에게 미움받지 않는 사교성과 적절한 눈치로 타이밍을 잘 알고 파고드는 등, 제가 어디를 가도 주변 사람들의 호감을 곧잘 얻어내곤 하던 성격의 노하우는, 이때부터 다져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너는 무슨 애가 그렇게 무던하니? 복사하기
“너는 무슨 애가 그렇게 무던하니?” 어린 시절, 어디를 가든 무난하게 적응을 잘해, 예민한 구석이 전혀 없었던 제가 가끔 듣곤 하던 말입니다. 낯선 곳에 가더라도 잠자리 적응을 잘해, 머리만 대면 곧바로 잠들어버리는 것은 물론, 물이나 음식도 가리는 바 없이 잘 받아들이는 입맛인 데다 배탈을 일으킨 적도 거의 없어, 그야말로 역마살에 최적화된 체질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어릴 때부터 이사나 여행 등의 기회가 잦아, 다양한 지방과 나라에서 머무르며 다채로운 문화권을 겪고 체험하는 경험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부모님이 이동이 잦은 직업을 가지고 일하시느라 저를 데리고 전국을 돌아다니신 데다, 이민의 꿈을 품고 나가 살았던 시절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뼈 체질에다 손발이 큼직하고 뭐든 소화도 잘 시키는 몸을 타고나, 어디를 가나 향수병이나 적응 기간 등으로 고생해본 경험이 없는 저를 볼 때마다, 부모님은 제게 여행에 최적화되어 태어난 몸이라고 혀를 내두르시기도 했습니다. 처음 이민의 꿈을 품고 건너왔을 시절, 부모님은 낯선 음식이나 문화에 조금 과도기를 겪고 있었지만 저는 스스럼없이 주변 주택가에 사는 아이들한테 서툴게 말을 걸고, 어떤 음식을 먹어도 무난하게 해치우는 등, 생활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낯선 땅에 와서도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것과 다르게, 저는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저기 친교를 맺으며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떤 지방이나 나라로 이사한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 원래 살던 아이처럼 쏘다닐 수 있는 저의 튼튼한 체력과 정신력은, 부모님이 저를 걱정하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 걸쳐 주저 없이 길을 떠나면서 도전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래 친구들과의 우정을 소중하게 여기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프로젝트를 수행하시는 대학에 이따금 쫓아가 프로그램을 견학하며 경험을 쌓았지만, 기본적인 교우 관계는 평범하게 쌓아 달라는 부모님의 부탁에 충실하기 위해, 나이 비슷한 아이들과 어우러져 학교생활을 보내는 것에도 충실한 시간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계산 수식이나 문제의 답을 금방 풀어내는 저를 그저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저는 제 능력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며 장황하게 감탄하는 어른들 틈바구니에 있는 것보다, 솔직한 말과 눈빛으로 저를 칭찬해줄 줄 아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 있는 것이 더욱 기분 좋게 느껴졌습니다.

또한, 부모님과 오래 친하게 교류하고 즐겁게 어울리던 친구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또한 그렇게 인생을 함께할 수 있을 만한 친구를 가지고 싶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저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로 ‘올려다보거나’, 아직 어린데도 똑똑하다며 ‘내려다보는’ 감각보다, 비슷한 체구와 키를 가지고 ‘동등하게’ 쳐다보며 교류할 수 있는 또래 친구들과의 우정을 저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저는 남보다 조금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모두가 속한 집단에 평범하게 섞여 들어갈 수 없다는 예감을 하고 있었기에, 저와 동등한 위치에서 어울려주는 친구들을 더욱 좋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남보다 생각이 깊고 많은 타입이라고 해서, 혼자만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가지 않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셨던 부모님의 도움은, 저로 하여금 책과 연구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현장의 감각을 일깨우고, 직접 부딪히며 성장해 나갈 수 있게 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빨리 익히고 배우는 재주를 가진 아이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는 무슨 놀이든 간에 금방 질려 버리던 아이였습니다. 새로운 놀이나 장난감을 발견하면 직성이 풀릴 때까지 몇 날 며칠 매달리는 대신, 끝이 보이기 시작하면 미련 없이 던지고 일어나 ‘다른 놀이는 없어?’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모두 교수이신 집안의 영향을 받았는지, 뭐든 빨리 익히고 배우는 재주가 있었던 저는, 그만큼 열정이 사라지는 속도도 빨라, 부모님이 사주신 책이나 장난감도 채 한 달이 가지 못해 다른 것을 사달라며 조르곤 했습니다. 일단 질리고 나면 다시 돌아보지 않는 칼 같음으로, 한 번 ‘끝까지 갔다’ 싶은 것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 습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저를 위한 장난감이나 책의 선별에도 신중한 기준을 두셨던 부모님은, 저의 습득 속도가 날로 빨라지면서, 점점 저의 수준을 맞춰 가시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다는 평가를 들었으나, 적어도 어릴 때만은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라도록 키우고 싶으셨던 부모님은, 저의 사고 수준을 무리하게 보통 아이들처럼 끼워 맞추는 것도 못할 짓이라 생각하여, 마침내 본인들이 전념하시던 연구 개발과 관련된 영역을 제게 조금씩 보여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공학 전공으로 전형적인 이과 타입이고, 어머니는 사회 문화 쪽에 관련된 연구를 하시던 분이었지만, 저는 어느 한쪽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 걸친 풍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발장구를 쳐봐도 금방 수면이 드러날 뿐인 어린이 풀장에서 노는 기분이었다면, 부모님이 저를 조금씩 인도하시기 시작한 드넓은 대양은, 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위풍당당한 존재감과 깊이가 느껴져, 저를 심히 두근거리게 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사람들의 장점을 보기 위해 노력하다 복사하기
힘든 형편에도 내색 하나 내지 않고, 언제나 긍정적인 마인드로 사람들을 대하며,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에게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타인의 단점 1가지를 발견한다면 그 사람의 장점 10가지를 떠올려 상쇄하는 식으로, 누군가의 콤플렉스나 미비한 점을 짚어주고 지적하기보다, 그 사람조차 미처 몰랐던 포인트를 찾고 칭찬하고자 애쓰던 아이였던 셈입니다. 사람의 장점은 제대로 발견되기 전까지 땅에 묻혀 숨겨져 있을 뿐인 씨앗 같아서, 물과 햇빛을 주듯 관심과 사랑으로 꾸준히 보듬기 시작하면,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자라나 찬란한 꽃으로 성장한다는 점이, 저를 매번 놀라고 떨리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런 자신의 장점을 발견할수록 사람은 더욱 피어나고, 아름다운 꽃에 둘러싸이게 되어, 콤플렉스나 단점조차 풍부한 꽃잎과 향기로 가리면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분명 존재하고는 있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해 땅에 꼭꼭 숨겨진 장점의 씨앗을 찾아내, 성장을 더욱 부추기는 칭찬의 비료를 뿌리며 차차 싹이 틔고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즐기곤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처럼 수많은 꽃을 피워, 온 세상이 꽃밭처럼 변해가는 풍경을 지켜보고픈 정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자신의 꽃을 피우게 된 사람은 타인의 꽃이나 씨앗도 쉽게 발견할 수 있게 되어, 누군가를 칭찬하고 장점을 북돋워 새로운 싹을 틔우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씨앗과 꽃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해외 여행을 통해 나의 가치를 다시 깨닫다 복사하기
‘너는 참 성실하고 우직한데, 가끔 보면 되게 텅 비어 보여.’ 학창시절 친구들이 제게 이따금 해주었던 말입니다. 저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어떤 과목이나 자질에도 빠지는 일 없이 항상 노력했지만, 그것은 제가 하고 싶다거나 필요로 하는 일이라기보다 ‘부모님의 기쁨’을 목적으로 한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눈에 띄게 떨어지는 성적을 가지면 부모님이 걱정하시겠지, 학원이나 공부 이것저것 투자하신 부분이 많은데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안타까워하실 거야, 나는 어차피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까 ‘부모님이 바라는 일’에 매진해도 괜찮지 않을까? 등의 생각이, 저로 하여금 얼핏 보기에는 누구보다 노력하는 우등생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왠지 맥이 없는 존재로 비치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다방면에 걸쳐 센스나 재주도 제법 갖추고 태어났고, 그런 능력을 부러워하는 친구들이나 높게 평가하며 이쪽 방면으로 오라고 하는 어른들도 많았지만, 어느 쪽이나 ‘내 길이 아니다’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기에, 어디에서 함부로 털어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어느 지점에 이르러 모든 의욕을 포기하고 멈춰 버리지 않을까, 생각했던 시기에 대해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은, 해외 장기 배낭여행을 갔다 오고 나서 몰라보게 달라진 저의 상태를 보면서 지금도 혀를 내두르곤 합니다. 제가 해외에 나가 한동안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대로 실종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진지하게 했더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말입니다.
뒤늦게 찾은 꿈, 여행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는 꿈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방황하고 다니던 어린애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장래 희망을 수도 없이 바꾸면서, 자신이 관심 가는 분야와 되고 싶은 목표에 대해 서서히 길을 찾아가곤 했지만, 저는 무엇에도 ‘이거다!’ 할 만한 길을 찾는 일이 없이, 그저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기계적인 입시 준비와 공부를 반복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장래 무슨 일을 선택하든 간에, 학력을 높여놔서 나쁠 것은 없다는 부모님의 말에 따라,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 공부에 매달리긴 했지만 제 앞날은 그저 불투명해 보일 뿐이었습니다. 저보다 성적이 뛰어나지 못해도, 일찌감치 적성을 찾아 구체적으로 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도, 여전히 나는 텅 비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저는 때때로 두려워지곤 했습니다.

‘대학에 가면 어떻게든 수가 생길 거야’라고, 일단 입시부터 통과하고 생각해 보라던 부모님의 말씀대로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도, 저는 그저 무기력할 뿐이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는 주변의 조언을 듣고 나서도, 변화가 없었던 저는 마침내 학교를 휴학하고 무작정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저를 위한 모든 환경이 구축된 익숙한 터전이 아닌, 낯선 공간이 주는 힘겨움과 색다른 풍경이, 저를 바꾸어 주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매일을 연명해야 하는 육체의 피로가, 정신적 고민을 억눌러 주리라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몇 달 정도 가벼운 일탈을 꾀하고 돌아올 셈이었으나, 그렇게 시작된 방랑은 저로 하여금 2년을 떠돌게 하며, 낯선 나라를 끊임없이 헤매고 다니는 매력에 푹 빠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현재 업무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할머니 댁에서 갖게 된 협동심과 예절 복사하기
편식을 즐기며 부모님께 마냥 응석을 부리던 시절, 저의 교우관계는 원활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중심주의에 제멋대로 구는 성향이 강했던 제 곁에, 친구로 오래 남아줄 만큼 인내심을 가진 아이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할머니댁에서 방학을 보내고, 과거 뚱뚱했던 몸집이 놀랄 만큼 날씬해져 돌아온 저는, 성격 면에서도 그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변화를 겪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을 때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맘껏 고집과 어리광으로 일관하며 태평하게 지낼 수 있었던 생활과 다르게, 외할머니댁에 머무를 때는 항상 밥값을 채우기 위해 제가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하루하루의 의무가 제법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 고집이나 성격을 조금씩 누그러뜨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고 힘을 합쳐 나갈 수 있는 성격으로 조금씩 변모한 저는, 몰라보게 날씬해진 모습으로 아이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을 계기로, 저의 변화를 어필하며 적극적인 교우관계를 맺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외할머니댁에서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예절과 갖춰야 하는 덕목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던 저는, 더이상 아이들을 피하게 하는 응석받이 떼쟁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저의 적극적인 변화를 부모님은 놀라워하시며, 단지 식습관을 고치기 위해 시골에 보내고자 했던 본인들의 선택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셨습니다. 또한, 나물이나 채소 반찬에 본격적으로 맛을 들이기 시작한 제게, 어머니는 매일 고기를 굽거나 햄이나 소시지를 부치는 대신, 영양소가 골고루 함유된 풍부한 식단을 마련해주시기 위해 매일 콧노래를 부르시며 고민하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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