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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 구성항목

성장과정 (3,7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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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을 돌보며 책임감을 기르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는 다양한 동물을 돌보면서 책임감을 기르길 원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많은 동물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마당 넓은 단독주택에 비교적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한 도시에 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기르곤 하는 고양이나 강아지부터 시작해서, 거북이, 햄스터, 토끼, 물고기 등, 저는 제 손길이 정기적으로 닿아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의 무게를 책임감 있게 느끼면서, 제가 남의 보살핌을 무조건 받아야 하는 어린애가 아닌, 나름의 의무를 진 한 사람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곤 했습니다. 부모님에게 무조건 응석 부리고만 싶어 했던 기질도, 애완동물을 키우면서 본격적으로 누그러지게 됐으니, 부모님의 의도는 잘 먹혀들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동물을 키우면서 제가 차츰 깨닫게 된 것은, 그 아이들이 어떤 외형과 특징을 지녔느냐에 따라 생존 방식이 변화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뒷다리가 발달하고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토끼는 달리기가 빠르고, 좁은 곳에 숨거나 높이 올라가기를 즐기는 고양이는 몸이 유연하게 탄력적이며, 오래 달리거나 여기저기 넓은 범위에 걸쳐 호기심을 갖는 강아지는 후각과 지구력, 체력이 발달하는 등, 각자의 적성에 맞는 재능과 생김이 그 아이들의 삶을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는, ‘나도 그럴까?’ 하는 호기심이 들곤 했습니다. 인간이 두 다리로 걷고 꼬리가 없으며, 손가락 동작이 유난히 발달한 이유 또한 제 인생과 깊게 관련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애완동물을 단순한 재미나 관상 목적으로 키우지 않고, 책임감을 가지면서 나름의 몫을 다하는 아이가 되길 바라셨던 부모님의 소망을 넘어서, 저는 그들을 통해 세상의 진리를 새삼 깨달아가는 창조적인 측면의 관찰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대 로봇"을 선망하고 동경하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의 제가 유독 선망하고 동경했던 존재는, TV나 영화에 곧잘 나오던 ‘거대 로봇’이었습니다. 걸어 다닐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고, 팔을 휘두르면 나무가 뽑혀 나가며, 광선 빔이나 로켓 펀치도 얼마든지 쏘아내면서 용맹하게 전투할 줄 아는 거인과도 같았던 그들 말입니다. 자연과학 책에서 동물이나 공룡을 접할 때도, 제가 까마득히 닿지 못할 높이와 범위로 올려다봐야 하는 많은 거대 생물들을 동경했던 저는, 과학 기술의 정수로 만들어졌다는 설정의 거대 로봇들이 인간 세상에서 펼치는 위용을 감상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뿌듯해지곤 했습니다. 그것은 처음 정글짐의 꼭대기에 올라가 하늘과 땅을 바라보거나, 전망대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때의 느낌과 비슷한 기분이었습니다. 광대한 세상에 비하면 지나치게 작고 약한 인간의 시야를 확장해주는 모든 거대한 존재들을, 저는 무척 사랑했던 것입니다.

올려다보기 까마득할 정도로 엄청난 압박감의 생물이나 기계를 상대하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 인간의 연약한 숙명을 벗어나고 싶어 했던 제 욕구는, 한때 코끼리나 고래 같은 거대 포유류를 상대하는 직업을 선망하는 쪽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공룡 관련 영화를 보면서, 지금은 멸종해 없어진 그들의 부재를 몹시 아쉬워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바라는 만큼 원대한 존재와 함께 있기에는, 문명의 한복판에 건설된 그들의 자리가 지나치게 좁고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므로, 저는 곧 답답함을 느껴 건축이나 기계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로봇이 상용화된 시대였다면 그 조종석에 탑승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꿨을 정도로, 기술의 힘을 빌려 저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어 했던 제 욕구는, 자연스럽게 제가 들어가 다룰 수 있는 기계의 범위인 중장비 계통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최대한 계획적인 소비를 하기 위해 노력하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는 금전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한 계획적인 소비를 하기 위해 애쓰는 성격이었습니다. 돈이 있을 때는 손에 잡히는 대로 쓰다가, 정작 필요한 상황이 되면 부모님께 손 벌리기 바빴던 형을 볼 때마다, ‘나는 저렇게 행동하지 말아야겠다’는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충동구매나 순전히 느낌이 꽂혔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저것 사들여 방을 채우던 형이 얼마 가지 않아 ‘질렸다’며 물건을 함부로 굴릴 때마다, 저는 순간적으로 구매욕이 든 물건에 대해서도 꼼꼼히 따져가며 소비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욕구에 무조건적 솔직하게 응하다가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형은 온몸으로 증명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짧아서 어떻게든 지금의 쾌락을 누려야 한다’는 형의 철학은 무척이나 확고했고, 물건 하나에도 꼼꼼히 따져가며 구매하는 제게 ‘그렇게 신경 쓰다가는 머리가 아파서 못 산다’며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구매를 하더라도 훨씬 저렴하게 할인을 받아 산다거나, 물량이 잘 풀리는 시기, 사람들의 관심도가 떨어져 훨씬 저렴해지는 경우 등을 여러모로 고려한 저의 소비 생활을 보며, 차츰 형도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구매에 시간을 들이는 만큼이나 가격과 시장 흐름을 알아보는 정보전에도 유리해져, 저는 눈에 띄기만 하면 그저 사들이는 형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형은 자잘한 소비에서는 여전히 충동적인 성향을 발휘했지만,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약간 대범한 마음을 먹고 사야 하는 부분에 이르게 되면, 제게 전적으로 맡기겠다며 대리 구매를 부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익을 본만큼의 차액에서 제게 수고비를 약간 떼어주는 등, 저를 인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카메라를 통해 일상을 담아내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부터 저는 주변 풍경을 마냥 기록하고 찍는 일을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어릴 때는 카메라를 들고 나가 프레임에 여기저기 담아보기를 즐기다가, 생일선물로 동영상 촬영 기능이 있는 캠코더를 받고 나서는, 정지된 순간이 아닌 소리와 움직임까지 담긴 흐름을 잡아낼 수 있는 재미가 좋아 여기저기 찍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빛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역광이 들거나, 흐리게 찍혀 손 떨림 현상까지 적나라하게 묻어났지만, 점차 익숙해지고 나서부터는 가족이나 친척 여행을 떠날 때마다 제가 촬영 담당을 맡는 등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저를 여기저기 부르시곤 하던 별명이 ‘촬영기사’였을 정도로 말입니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좋아 보이는 풍경을 선명하고 정확하게 담는 일에 주력했다가, 차츰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포착할 수 있는 묘한 이미지나, 그저 짧게 지나갈 뿐인 순간의 미학을 담아내는 쪽으로 취향이 바뀌면서, 제 작품 세계 또한 천차만별의 단계를 거쳤습니다. 아직도 일부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제가 어떤 소재와 이미지에 천착하고 있었는지 어렴풋이 감이 잡히는 것 같아,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그 시절 관심 가는 분야에만 무작정 매달려, 의도를 숨기거나 강약을 조절하지도 않고 집착하던 열정의 흔적이 남은 영상이나 사진을 마주할 때마다, 부끄러울 정도로 순수했던 유년기와 사춘기의 추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기술이 많이 숙달됐지만, 스스로 질려서 그만둘 때까지 끝을 모르고 매달리던 열정만큼은 약간 사그라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청춘이 풍기는 풋내는, 제게 수치심을 들게 하면서도 아련한 향수를 자극해, 저로 하여금 과거로의 추억 여행을 반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을 배우려 노력하다 복사하기
상대를 자연스럽게 설득하고 뜻을 전하는 기술은, 단지 어른들에게만 좋게 어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활용 가능하다는 여동생의 말을 새겨들으며, 똑같은 말이라도 더욱 부드럽게 전할 수 있도록 노력에 매진한 시기였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본심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으나, 그 말의 표현을 제대로 고르지 못해 상대의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잦았던 아이로, 그렇게 관계가 꼬이더라도 ‘그렇게 느끼게끔 말을 한 나의 잘못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체념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여동생은 ‘말로 틀어진 사이라면, 역시 말로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사람의 관계’라며 진심으로 임하고자 하는 태도를 단지 속내로 취하고 있지만 말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통하는 ‘텔레파시’를 타고나지 못한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입니다. 언어와 문자가 인간의 의사소통 체계로 성립된 이상, 그 기본적인 수단까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입니다. 또한, 제가 평소 부모님께 제대로 애정 표현을 하지 못해 무뚝뚝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점에 대해서도 지적하며,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사랑한다’, ‘좋아한다’ 말로 표현하는 행위에 전혀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도 해주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괜한 수치심에 혼자 안달복달할 필요는 없다고 말입니다. 또한, 구체적인 표현으로 드러나지 않은 마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일침은, 저의 가슴 깊숙이 남았습니다.
단짝친구 덕분에 적극적으로 재능을 발견하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의 단짝 친구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리더의 자질을 타고난 아이였습니다. 어딜 가도 주목받을 만한 외모에, 당당한 자세와 분명한 목소리, 자기 의지를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드러내기에 거리낌이 없는 주체적인 성격까지, 타고난 자질과 부모님의 리더십 훈육이 좋은 조화를 이루어 더욱 성장을 돋보이게 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 아이와 유치원 때부터 소꿉친구로 같이 지냈던 저는, 성격이 소심하고 다소 주저하는 면이 있어, 놀림을 당해도 그저 울먹거릴 줄밖에 몰랐던지라 친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손을 같이 붙잡고 선생님께 항의하러 가준 친구가 아니었다면, 저는 이제까지 누구한테 하소연하지 못해 가슴에 꽉 막힌 답답증이 꽤 많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친구가 어릴 때부터 반드시 위대한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집에 쌓여 있는 위인전집을 볼 때마다, 훗날 이런 과거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그 업적을 찬양받을 친구의 미래 모습을 떠올리며 기분이 좋아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 저는 어떤 존재로 친구의 곁에 자리 잡고 있을지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앞날에 대한 별다른 기대 없이, ‘내가 무슨 재능을 드러낼 수 있을까’ 다소 한탄하며 살았던 저의 생각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의 일이었습니다. ‘나도 나름의 역할로 훗날 친구의 자서전이나 위인전에 같이 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목표가, 저를 단지 친구에게 묻어가는 역할에서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재능의 계발을 향해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친구의 존재감은 너무 높고 환하게 빛나서 저를 좌절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주저앉아서는 그 아이의 옆에 있기도 힘든 패배자가 되리라는 위기감에서 말입니다.
편식이 심했던 아이, 시골 외할머니 댁에서 편식을 고치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는 채소를 멀리하고 고기에만 집착하며 제멋대로 편식하던 응석받이였습니다. 태어날 당시 체중이 심각하게 부족했던 미숙아로, 온 집안의 걱정을 받으며 마음껏 고집부리고 제 좋을 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가정환경이, 식습관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마른 몸에 입까지 짧아, 그나마 잘 받아먹는 고기라도 먹여주지 않으면 건강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부모님은 일단 저의 회복이 우선이라는 근거로 편식을 용인하셨고, 그 후로 저는 몰라보게 살이 붙어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큼직한 덩치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뼈가 드러나게 말랐던 예전에 비하면 놀라운 변화라고 부모님은 좋아하셨지만, 영양 불균형에 따른 비정상적인 성장이 이뤄진 탓에, 건강하지 않기로는 예전 미숙아 시절과 별다를 바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뒤늦게 편식 습관을 고치려고 해도, 자극적이고 기름진 맛에 길들어 쉽게 바뀌지 못했던 저는, 특단의 조치로 방학 때 시골 외할머니댁에 맡겨져, 손수 만들어주신 음식을 매 끼니 먹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몰래 숨겨온 과자나 간식을 몰래 꺼내 먹으며 버틸 생각이었지만, 그나마도 얼마 가지 못했고, 엄하고 과묵하신 성격의 할아버지와 함께 매일 일찍부터 밭에 나가 일을 돕다 보면, 도저히 음식을 가리며 거부할 만한 형편이 못 됐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제가 서울에 있을 때는 그렇게 기를 쓰며 거부하던 나물이나 김치 같은 채소 반찬에 조금씩 입맛을 길들이기 시작하자, 저는 어느새 편식하던 것도 잊고 할머니의 손맛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는 배고프지 않아도 ‘그저 맛있는 것을 새로 먹기 위해’ 위에 꾸역꾸역 음식을 채워 넣었던 반면, 외할머니댁에서는 항상 충분한 노동과 식사를 병행하며, ‘배고파지고 나서야 겨우 식사가 가능해지는’ 절실한 허기를 항상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력하는 가치를 어머니에게 배우다 복사하기
저는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으나, 어머니처럼 누군가를 돕고 다분히 평범한 일상이 영위될 수 있도록 차분히 노력할 수 있는 자질을 빼닮아,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시기였습니다. 아버지의 작품에 관심이 있으나, 그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끌어올리는 면에서는 전혀 관심이 있지 않고, 작품의 질을 위해서라면 아버지의 삶이 어떤 진창에 처박혀도 아랑곳하지 않던 아버지 작품의 지지자들은 그런 저의 자질을 아쉬워했지만, 저는 스스로 타고난 자질이 아버지의 비일상보다 어머니의 일상에 훨씬 가깝다는 사실에 가슴 깊이 안도했습니다.

학교에는 남들의 눈에 튀지 못해 안달 내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저는 자기만의 템포를 유지하며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타인과 비슷하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싶다, 그러면서 누군가를 도와 세상의 작은 일이나마 원활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면 좋겠다. 별다른 소망이나 욕구가 없던 저의 삶에, 유일하게 롤 모델이자 선망하는 존재가 되어주셨던 분은 바로 어머니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남들도 하는 일’, ‘하찮고 보잘것없는 일’,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떨칠 수 없는 일’이라며 폄하하기 쉬운 보조 자리에도 더없이 만족하며, 그 안에서 안정을 찾는 아름다움을 지향하셨던 어머니처럼, 저 또한 세상의 사람들이 너무 ‘평범하다’고 여기지만, 그들이 없으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업무에 종사하고 싶은 마음을 먹곤 했습니다.
아이들의 환심을 돈으로? 호감가는 아이를 통해 잘못된 점을 깨닫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저는 사교성이 뛰어나지 못한 약점을 돈으로 커버하려고 애쓰던 아이였습니다. 부모님은 유복한 환경에서 저를 키우면서도, 무엇이든 내주지 못해 안달하실 만큼 저를 귀애하셨기 때문에, 용돈도 항상 어린애가 받기에는 차고 넘치는 수준으로 두둑하게 쥐여주며 ‘친구들에게 넉넉하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온 집안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했던 저는, 또래 집단이나 나이 비슷한 형과 누나들한테도 은연중에 그런 태도를 원했기 때문에, 교우관계를 좀처럼 형성하지 못하고 겉돌기 마련이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뭐든 해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관심이나 사랑을 끊임없이 원하고, 떠받들리는 것이 당연한 어린애는 다들 슬슬 피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제 곁에는 제가 물정 모르고 써대는 돈을 받기 위한 아이들이 있을 뿐이었고, 저는 더욱 많은 돈을 써야만 친구 관계가 유지된다는 강박관념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수북이 타다 쓰곤 했습니다. 부모님이 어디다 쓸 생각이냐고 물으시면,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쪼르르 가서 조르는 등 제가 얻어낼 수 있는 최대의 돈으로,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던 것입니다. 이런 저의 좋지 않은 버릇을 깨준 사람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이 되어 만난 친구로, 학기 도중에 전학을 왔으면서도 운동신경이 좋고 쾌활해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빠르게 적응해가던 그 아이에게, 저는 호감을 느끼고 비싼 운동화나 간식을 사주며 그의 관심을 끌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절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해, 그때까지 좌절이나 실패를 겪어보지 못하고 살았던 저의 인생에 크나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손수 지은 목조 집에서 꿈을 찾아나가다 복사하기
어린 시절, 제가 살던 집은 아버지가 손수 지은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목수로 오랫동안 살아오시며 본인의 삶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는, 집에서 쓰는 책상이나 책꽂이 등의 가구나 침대에 이르기까지, 저희가 원하는 무엇이든 손수 만들어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아버지는 저희가 원하는 물건을 만들어주실 때마다, 항상 나무부터 구해 손질하고 가공하는 모습부터 차츰 틀이 짜여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보여주시는 것을 즐겼고, 저는 그저 보통의 나무나 널빤지로 보였던 존재가. 차츰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자연스러운 형상을 갖춰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저 감탄하곤 했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는 그런 아버지의 곁에서 손수 일을 도와 보기도 했습니다.

여성스러운 성격의 누나는 그런 쪽에 도통 흥미가 없었지만, 저는 한때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목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을 정도로, 아버지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던 것입니다. 생명을 가지지 못하고 우리와 전혀 다른 이질감을 가진 듯한 금속이나 시멘트 등의 재료와 다르게, 나무는 한때 생명을 가지고 호흡을 나누었던 흔적이 온몸 구석구석에 남아 우리 생활과 조화를 이뤄나갈 줄 아는 불멸의 존재였습니다. 누나는 나무가 불에 너무 쉽게 탄다면서, 믿음이 잘 가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저는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면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인간 또한 불에서 오래 버티는 내구성을 가지고 있지 않듯, 수분과 화기 등에 인간처럼 민감할 수밖에 없는 목재가구나 건물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서로를 상생하게 하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친근함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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