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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4,05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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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방면의 공부를 하며 유동적인 학습을 해오다 복사하기
부모님은 저 또한 부모님처럼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방면에서 배우고 활동하며, 제가 공부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즐길 줄 아는 학생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제가 학교 성적을 매번 상위권으로 유지하면서도, ‘지금의 기준이 어른이 되어서까지 만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니,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조언을 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보통 아이들처럼 학원을 가기보다, 부모님과 함께 토론하고 공부하며 제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고 채워나가는 방식을 즐겼고, 누군가의 손에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키워지기보다 혼자만의 걸음마로 인생을 개척하는 방법을 깨우쳤습니다.

입시를 위한 공부는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분야에서 더욱 많은 선택지와 고도의 가능성을 얻기 위한 뒷받침일 뿐이며, 그보다는 제가 진정 마음으로 품고 노력하고 싶어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며 되짚어 주신 부모님 덕분에, 저는 단기적인 목표가 아닌 항상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삶이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사춘기 시절에, 학교와 입시 공부의 중압감까지 덤으로 달고 다니던 친구들과 다르게, 철저히 저의 선택을 존중받고 오직 저를 위해 쓰이게 될 노력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저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학창시절의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학원에 무조건 묶여 지낼 때, 저는 제가 보고 싶은 문화 행사나 체험 등을 보러 다니면서, 부모님과 자연스러운 토론 하에 더욱 유동적인 학습을 추구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급식을 통해 '예민한 미각"을 확인하다 복사하기
초등학교 때까지 도시락을 싸서 다니다가, 급식이 본격화되었던 중학교 때는 입맛에 맞지 않는 밥을 먹느라 상당히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편식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장 장사를 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 솜씨 좋으셨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집 밥을 먹으며 자랐던 저는, 아이들에게 그저 충분한 영양을 채우고자 의무적으로 음식을 만들어낼 뿐인 그 당시 급식업체와 잘 맞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혼자 고생을 겪던 저와 다르게, 아무렇지 않게 급식을 먹으러 내려가는 아이들을 볼 때면, 저 혼자 예민한가 싶어 많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보통의 가정환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손맛을 먹으면서 자랐고, 학교 급식이 특출나게 맛을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저는 다른 아이들이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저 혼자 응석을 부리나 싶어 우울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스스럼없이 급식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겨우 입맛을 억눌러 한 그릇씩 비우고 집에 돌아올 때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만들어둔 가지각색 반찬과 온갖 요리가 저의 입맛을 도로 복구시키곤 했지만 말입니다. 상당히 괴로운 번민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중학생 시절을 졸업하고, 학군 내에서 급식 맛이 제일 좋기로 유명한 고등학교에 진학한 다음에는, 예전만큼 괴로운 식사 시간을 가질 필요가 없어 약간 안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 급식의 맛이 얼마나 밍밍하고 사람을 괴롭히는 맛이었는지 다시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남보다 좋은 손맛의 가정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은 제 나름의 자부심이었지만, 이때는 그 장점이 오히려 지나치게 예민한 단점으로 작용한 사례키도 했던 것입니다.
폭넓은 공부와 특기를 살린 아르바이트 복사하기
<폭넓은 공부와 특기를 살린 아르바이트>
여름에는 거의 부산 해운대에서 2~3주씩, 겨울에는 스키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자랐습니다. 휴양지에 가다 보니 외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스키를 잘 타는 것을 칭찬해주는 외국인들과 종종 대화하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중학교 때부터 영어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였습니다.
대학교에 진학할 때에도 외국에 자주 나갈 수 있고 외국인들과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무역학과로 진학하였습니다. 경제학과 경영학, 그리고 세계시장 경제의 흐름, 자금의 흐름, 무역 관련 법규 등 무역과 관련된 지식과 실무에 필요한 서류 작성 능력을 키웠습니다. 일상회화보다는 전문성이 필요한 무역영어도 즐겁게 공부하였습니다.

대학 시절은 방학이 길어서 방학을 이용하여 저의 특기를 살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 이상의 돈을 벌었습니다. 대한적십자사에서 라이프 가드(인명구조원)자격증을 취득하였고, 고등학교 때 이미 스키레벨 2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겨울방학 동안은 어려서부터 다니던 스키장에서 강사로 아르바이트하였고, 학기 중에는 스포츠센터에서 수영강사로 아르바이트하였습니다. 학기 중에는 파트타임으로 수영강습을 하였고, 여름방학에는 종일반으로 하면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수입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은 이후 도쿄로 유학을 갈 때 사용하여 부모님의 부담을 일정 정도 덜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가장 역할을 위해 공업고등학교로 진학 복사하기
<가장 역할을 위해 공업고등학교로 진학>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고등학교도 사치인 것 같았지만, 어머니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고등학교는 나와야 사람 노릇 하면서 살 수 있다고 설득하셔서,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취업을 위해 기계과를 선택하여 학업에 충실하였고, 방과 후에는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에도 공부를 못하는 편이 아니어서, 고등학교 공부는 수업시간에 집중하고 시험 기간에 집중해서 공부하면서도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이해가 빠르고 손재주가 있어서 실습할 때마다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회로설계, 용접이나 CAD, 기초제도, 배관 등 기계를 다는 과목들이 적성에 잘 맞아서 재미도 있었고, 소질도 있어서 실습마다 정확하고 빠르게 작업을 하고, 친구들의 작업도 도와주었습니다. 재미있게 공부를 하다 보니, 전문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지만, 공부할 기회는 나중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으로 취업을 준비하였습니다.
철저한 위생관리를 통한 먹거리를 강조하다 복사하기
‘쓰레기 만두 파동’을 기억하십니까? 그 당시 우리 사회 먹거리에 불안감이 엄습하였습니다. 길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던 만두. 저 역시 즐겨 먹던 간식거리였습니다. 만두 뿐 아니라 단무지 등등 우리가 먹는 음식 중에 안전한 것은 없었습니다. 식품 공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 먹거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던 저는 학우들과 함께 캠페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인간에게 먹는 것은 최대 즐거움이며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식품 위생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구내 식당부터 철저한 위생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캠페인을 펼쳐 나갔습니다. 구내 식당에는 여러 업체들이 경쟁을 거쳐 선발되는데 이러한 과정이 투명하게 진행되어야 식품의 질도 높아지고 위생 상태도 양호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학생회와 연합으로 저희는 조사를 진행하여 구내 식당의 위생상태를 점검하였습니다. 또한 다음 해 구내 식당 업체 선정에 참여하여 식품의 위생상태와 안전 점검을 꼼꼼하게 체크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캠페인을 펼치며 누군가는 꼭 해야하는 일이라 생각하였고, 그러한 일을 앞장서서 추진할 수 있었던 제가 자랑스러워졌습니다. 고객의 청결한 먹거리를 책임지겠습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복사하기
저는 새벽같이 장사를 나가시는 할머니 덕분에 아침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갈 때도 남들보다 먼저 일찍 가서 자유시간을 만끽했습니다. 혼자 책을 읽기도 하고, 자율학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모범 학생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시절에는 선도부원을 맡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저는 친구들에게 부지런하고 솔선수범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학생이었습니다. 제는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습니다. 당시 선도부장으로 있을 때 한 친구가 매일 지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선도부장으로서 벌점을 계속 매겼는데 이제는 경고 수준을 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계속 지각을 했습니다. 저는 무언가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 친구에게 학생주임 선생님께 얘기하면 큰일 날 수 있으니 사정을 얘기해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결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선도부원은 그 친구에게 할 것은 다했으니 보고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친구가 뭔가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친구에게 해가 되는 것은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 친구를 믿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던 사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 주임 선생님께는 보고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중에 그 친구는 3개월이 흐른 뒤에야 부모님의 교통사고 소식을 제게 말하며 동생들을 챙기고 자신이 오기 때문에 늦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혹시라도 부모님의 교통사고 소식을 입 밖으로 내면 혹시나 더 나쁜 일이 생길까봐 차마 얘기도 꺼내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고맙다며 이제는 부모님이 거의 완쾌되어서 지각할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원리, 원칙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도전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복사하기
저는 아버지와 같은 성격으로 언제나 도전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내 길은 내가 뚫는다는 목표로 도전을 서슴지 않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각종 대회는 물론 여러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처음 마라톤을 완주했던 것입니다. 평소에 운동을 하기는 하였지만 완주라는 것은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만 있었지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중간 이후에는 제가 이것을 뛰는 이유 자체가 제 자신에 대한 오만을 버리기 위한 것이라는 어떤 사명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에게 다리가 부러져도 힘내는 것이 제 자신에게 이기는 것이라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네가 여태까지 뭐든지 다 했다고 해서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 최선을 다한 것이 있느냐. 자만에 빠지지 마라’라고 생각하며 일부러 다리가 부러져라 달렸습니다. 결국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 완주를 하였는데 이후 더 겸손해지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에는 친한 친구와 함께 자전거로 전국 배낭여행을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어머니께서는 아주 위험하다고 언제나 걱정이 많으셨고, 아버지께서는 흔쾌히 저의 도전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배낭여행에서도 모든 지역 어르신들은 제게 밥도 먹여주고 잠자리도 마련해주시는 고마운 분들뿐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활동적으로 의미 있는 것을 찾아다니곤 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학업에 대해서는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재수생활 역시 제게는 도전과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친구들이 술 한 잔 하자며 매일 공부만 하지 말라는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와의 연락을 끊은 채 공부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한 해만 열심히 공부하여 제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등록금을 내고 반년 뒤 군대에 입대하였습니다. 제대 후 공사 현장에서 돈을 모아 호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다시 복학한 이후에는 언제나 그렇듯 학과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언제나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왔습니다.
활동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복사하기
저는 언제나 활동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주말마다 아버지와 함께 산을 탔습니다, 그리고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를 끈질기게 물고 넘어져서 목표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런 성향은 학과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많이 작용하게 되었고 연구개발과 밀접한 학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희 학과는 일주일에 12시간씩 실험을 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리고 실험할 때는 공동의 목표가 있지만 개인에게 할당량이 있었고 저는 그런 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연구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하나에 몰두하는 저의 성향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틈틈이 아버지와 주말마다 계속적으로 산을 타고 있습니다.
수학, 경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경제적인 활동 복사하기
저는 어머니의 경제적 관념을 투철하게 체득하며 수학에 관심이 많았고, 중고등학교를 거쳐 경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영에 관련된 원서를 찾아 읽고 스티브 잡스와 같은 경영인을 꿈꿔오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모님께 독립심을 기르기 위해 제 인생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의미로 입학과 동시에 자취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특히 어머니는 경제적 관념에서 집을 따로 얻는 것은 손해라며 반대하셨지만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저의 믿음을 바탕으로 1년의 생활을 전제로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1년 동안 제가 어머니께 이익에 해당하는 성과를 올린다면 계속해서 독립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1년의 등록금과 1년의 자취방세를 제가 가진 기본 자금으로 생각하고 다음 해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학업적 성과도 밑바탕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2년여 동안 학업에 정진했고 장학금과 함께 군 제대 이후까지 제가 경제적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 한 매체의 온라인 쇼핑몰의 담당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쇼핑몰은 그만두었지만 제가 앞으로도 많이 이용하게 될 경험을 쌓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 복사하기
선생님께 예의 바르고, 친구들을 존중하는 태도로 학교생활을 했던 저는 선생님 친구들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한 번도 다툰적이 없었고, 오히려 친구들 간의 불화를 해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친구들 간의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둘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여 합의점을 찾아야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익힐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제가 친구들의 상담자 역할을 하게된 것 같습니다. 저는 중간자의 입장에서 누구의 편을 들지 않고 서로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전달해주려 노력했습니다. 얘기를 듣다보면 서로의 작은 오해로 문제가 커진 경우도 많았고, 서로 충분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친구들의 갈등을 해결하고 상담을 해주면서 듣는 것이 최고의 해결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회생활에서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말만을 하려고 하는 현대사회에서 듣는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변에 사람이 많은 이유, 저를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제가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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